동역자이야기

작은 불빛 하나, 아직 꺼지지 않았다 / 안병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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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남교회
댓글 1건 조회 64회 작성일 25-04-04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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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질 무렵, 교회 마당을 스치듯 걷다 보면 가로등이 깜빡이는 소리가 바람 사이로 묻어나온다. 쇠기둥에는 초록빛 이끼가 얼룩처럼 번져 있고, 등갓 안쪽 유리엔 계절을 몇 번이고 넘긴 벌레 날개의 흔적이 말라붙어 있다. 이따금 그 곁에 앉았다 날아가는 물까치 두엇이 먼지를 흩뜨린다. 그 불빛은 어떤 날엔 처음부터 끝까지 말없이 어둠을 받아들이는가 하면, 또 어떤 날엔 망설이는 듯 어둠 위로 조심스럽게 빛을 떨군다. 완전히 꺼지지 않고, 또렷이 켜지지도 않은 채, 그 자리에 그렇게 머물러 있는 가로등 하나. 마당을 지나치는 이들은 그저 무심히 지나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깜빡임은 어떤 생의 버팀처럼 보인다.

그 불빛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오래된 공동체 하나가 떠오른다. 작고 조용한 교회. 단단한 시멘트 외벽 위에는 세월이 그린 실금들이 얇게 퍼져 있고, 오래된 벤치는 시간이 지나며 느릿한 삐걱임을 품고 있다. 유리창은 늘 반투명한 먼지를 안고 있으며, 비가 오면 처마 끝에서 오래된 묵은 냄새가 스며든다. 오랜 세월 그 자리를 지켜 온 교회이기에, 사람들 사이에는 익숙함과 낯설음이 동시에 깃들어 있다. 함께 예배를 드리고, 함께 찬송을 부르지만, 마음속에는 차마 꺼내지 못한 말과 눈빛이 엉켜 있다. 말이 오가고, 침묵이 쌓인다. 미세한 오해 하나가 결을 따라 퍼지고, 조용한 상처는 어느새 얼굴 위에 표정을 얹는다.

사람과 사람이 가까워진다는 것은 동시에 조심스러워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서로를 알수록 관계는 예민해지고, 거리가 가까울수록 말은 더욱 무거워지며, 침묵은 더욱 길어진다. 말은 때때로 고백처럼 따뜻하게 다가오지만, 또 때때로 칼처럼 조용히 깊게 들어온다. 뒷말은 표정 뒤에 숨어 있다가 어느새 생각보다 멀리 퍼지고, 마음은 그렇게 조금씩 닫힌다. 어떤 말은 잊히지 않고, 어떤 침묵은 오래 남는다. 결국 말보다 마음이 먼저 피곤해지는 순간들이 있다.

그런 교회는 마치 깜빡이는 가로등 같다. 무너진 것도 아니고, 꺼져 버린 것도 아니다. 다만 지쳐 있고, 서툴 뿐이다. 관계란 늘 그렇다. 오랜 시간 같은 공간을 공유하다 보면 편안함이 익숙해지는 동시에, 불편한 침묵이 스며들기도 한다. 아주 사소한 차이가 반복되면 공간의 온도는 금세 차가워진다. 그러나 그 안에 남은 따뜻함 하나가 있다면, 아직은 살아 있는 온기다. 숨이 붙어 있다는 건,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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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가 무너지기 시작할 때, 그것은 대개 조용히 온다. 눈에 띄게 깨지는 것도 아니고, 갑작스럽게 부서지는 것도 아니다. 무심한 말 한마디, 지나친 해석 하나, 웃으며 흘려보내기엔 이미 조금 아팠던 말들, 그런 것들이 모여 관계의 결을 흔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회복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조용히, 아주 작고 사소한 것에서 시작된다. 진심 어린 눈빛, 조심스러운 한 문장, 말없이 건네는 손길 하나. 그 작은 움직임 하나가 조용히 다시 연결을 시작한다.

신앙은 원래 따뜻함으로 남아야 할 무엇이다. 따뜻한 기도, 따뜻한 말, 따뜻한 시선, 신앙이 식어버린다는 건 결국 말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판단과 해석만 남을 때 일어난다. 마음을 열기보다는 해석하려 들고, 이해보다는 의심이 먼저 앞설 때, 신앙은 모양은 남고 온기는 사라진다. 그래서 공동체의 회복은 말을 다시 ‘말답게’ 회복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말이 다시 말이 되기 위해선, 그 안에 사랑과 신중함이 함께 있어야 한다. 언어는 가장 빠르게 닿는 손이며, 가장 깊이 스며드는 빛이기 때문이다.

신앙은 눈물로도, 웃음으로도 표현되지만, 결국은 기다림으로 증명된다. 말이 부족할 때는 눈빛이 대신하고, 눈빛이 부족할 때는 손끝이 대신하며, 손끝조차 힘이 없을 때는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된다. 공동체가 존재한다는 것, 계속 모이고 있다는 것, 여전히 예배가 드려지고 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하나님은 일하신다.

서로가 서로에게 한 번 더 유연해질 수 있다면, 공동체는 다시 숨을 쉬게 된다. 교회란 결국 사람과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곳이고, 살아간다는 건 상처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견디고 돌보는 법을 배워 가는 일이다. 말의 무게를 견디는 사람, 침묵의 공간을 메우는 사람, 자리를 지키는 사람, 그들이 있는 교회는 다시 살아난다.

가로등은 오늘도 깜빡인다. 누군가는 그것을 고장이라 하고, 누군가는 그것을 생존이라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빛이다. 끝내 어둠에 삼켜지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다시 한 번 깜빡이는 그 빛. 공동체도 그렇다. 다 꺼진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아직 누군가는 기도하고 있고, 누군가는 참고 있고, 누군가는 다시 말을 걸 준비를 하고 있다. 누군가는 여전히 주일에 찬송을 부르고, 누군가는 수요일 저녁 문을 열고 기도 자리에 앉는다. 누군가는 부엌에서 조용히 커피포트를 닦고, 누군가는 익숙한 찬송가의 멜로디를 따라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그리고 누군가는 말없이 벽에 붙은 기도제목을 읽고, 다시 펜을 들어 ‘함께 기도합니다’라고 써 넣는다. 그런 작고 보이지 않는 마음들이 이 공동체를 붙들고 있다. 그래서 아직은 괜찮다. 완전하지 않아도, 흔들려도, 꺼지지만 않는다면. 작은 불빛 하나. 그 불빛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공동체는 다시 걸어갈 수 있다.


댓글목록

life님의 댓글

life 작성일

그렇습니다. 목사님~!
아직은 서툴고 어린 연약한 우리 구성원들이지만 분명 살아있어 따뜻한 체온을 지닌 교회 공동체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우리 구성원 모두의 심령을 일으켜 세우실 것을 믿습니다.
은혜로운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