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역자이야기

아버지의 걸음, 추억의 멜로디 / 김해선 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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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남교회
댓글 0건 조회 71회 작성일 25-03-22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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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교회로 피아노 연습을 하러 갔습니다. 피아노를 치며 어릴 적 아버지와의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 채송화도 봉숭아도 한창입니다. 아빠가 매어놓은 새끼줄 따라 나팔꽃도 어울리게 피었습니다.” 이 곡을 연주하는 동안, 아버지와의 추억이 떠올라 눈물이 흘렀습니다. 한참을 울다가, 아버지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전화를 받으시는 아버지의 목소리는 힘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한숨 주무시고 일어나셨다고 하셨습니다. 나도 모르게 아버지께 잘하지 못했던 순간들이 떠올랐고, 아버지를 저리 보내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제가 초등학교 때 쌀 장사를 하셨습니다. 80kg이나 되는 쌀을 자전거로 배달하시거나, 자전거로 갈 수 없는 곳은 어깨에 들쳐매고 배달하셨습니다. 언덕길을 오르실 때면 저는 뒤에서 밀어드리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 장사도 세월이 지나니 점점 어려워져, 결국 과일 장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자녀들에게 과일을 먹이고 싶은 마음이 컸던 아버지를 보며, 저는 아버지가 참 불쌍하다고 느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젊었을 때 서울로 두 번이나 공부하러 올라가셨지만, 할머니께서 일찍 혼자가 되셔서 아버지 없이는 살 수 없다고 하셔서 결국 공부를 마치지 못하고 내려오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한 번도 인생을 후회하거나 원망하는 소리를 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사촌 형님이 보해소주 회장이었기에 그곳에 들어가셨지만, 술을 전혀 못하셔서 결국 그만두고 장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아버지는 늘 열심히 일하셨지만, 살림살이는 항상 어려웠습니다. 그때는 가난이 싫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가난 속에서도 나름 행복했습니다. 부모님께서 가난의 고통을 우리 자녀들에게 전가하지 않으려고 애쓰셨기 때문입니다.

어릴 적, 우리는 먹을 것이 부족한 시절이었습니다. 늦은 저녁, 배가 고플 때면 밥을 비벼 먹거나 부침개를 해 먹으며 깔깔대고 웃곤 했습니다. 지금은 먹을 것이 넘쳐나는 시대지만, 그때의 추억은 저에게 소중하게 남아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자녀들에게 한 번도 욕을 하거나 매를 들지 않으셨고, 늘 딸들을 예뻐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보니, 부모님께서는 자녀들을 온실의 화초처럼 키우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강하지 못하게 키우신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제 자녀들을 키울 때 잘못하면 매를 들고 야단을 많이 쳤습니다. 때로는 독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대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께서는 자녀들은 사랑으로만 키워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엄마는 아버지께서 돈을 많이 못 버셨기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엄마는 너무 순박하셔서 아버지가 모시고 다니지 않으면 혼자 어디도 못 가셨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세상을 너무 몰랐던 엄마는 가족 외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엄마는 자녀들만을 바라보며 살아가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엄마의 몸은 점점 지쳐갔고, 결국 건강검진을 받으신 후 간암이라는 진단을 받으셨습니다. 엄마는 평소에도 머리가 아프다며 진통제로 하루하루를 버티셨습니다. 그렇게 화순 전대병원에 입원하셨고, 입원한 지 21일 만에 우리는 장례를 치러야 했습니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에 우리는 병원이 떠나가도록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그때 저는 이기적이었습니다. 하나뿐인 남동생은 교회에서 선교를 위해 한국을 떠나 있었고, 엄마는 호스피스 병동에 계셨습니다. 동생이 떠난 지 2년 만에, 엄마는 결국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동생이 선교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는 이미 엄마의 장례가 끝난 후였습니다. 저는 아직도 이기적입니다. 내 가족에게는 최선을 다하지만, 부모님께는 그렇게 하지 못한 것 같아 죄책감이 듭니다. 엄마가 천국으로 가신 지 10년이 넘었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그때의 충격을 잊지 못하시고 3년간 힘들어하셨습니다.

아버지는 그 후 고향에서 8년 정도 사시다가 다시 광주로 이사 오셨습니다. 저는 그때도 아버지가 계신 시골 집에서 하룻밤도 못 자는 이기적인 자식이었습니다. 지금은 아버지께서 광주에서 잘 적응하시고, 항상 초긍정적인 태도로 웃으며 지내고 계십니다.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도, 저는 한때 아버지를 무능하게 여기고 불평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웃기만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연세가 드셨지만, 여전히 자녀들을 위해 애쓰십니다. 작년에는 영동까지 혼자 기차를 타고 가셔서 포도 두 박스를 사 오셨습니다. 그때 언니에게 혼이 나셨습니다. 여기는 포도가 없어서 그렇게 먼 곳까지 가셨냐고 물었더니, 아버지는 포도 축제를 해서 우리에게 포도를 주고 싶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올해도 수박을 한 통씩 주려고 사 놓으시고, 막내 사위에게 가져가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여전히 자녀들을 위해 생각하고 계십니다.

요즘 아버지께서는 걷기가 힘드셔서 남동생이 부축해서 교회에 모시고 가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잠시 아버지를 뵈러 다녀왔습니다. 식사하시면서 아버지께서 수의옷을 사 놓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작은 사위에게 혼이 나셨습니다. 아직 더 사실 수 있는데 벌써 사 놓으셨냐고요. 아버지는 그저 싸게 나와서 사 놓으셨다고, 우리에게 신경 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지팡이를 짚고 절뚝거리며 걸어가시는 뒷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려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건강히 우리 곁에 오래오래 계셔주세요. 그리고 자주 전화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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