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역자이야기

다음세대를 위한씨앗심기 / 김봉연 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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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남교회
댓글 0건 조회 41회 작성일 25-04-04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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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이라는 아주 오랜 옛날에 나도 다음세대였다. 중학교에 입학할 그 어린 나이에 나는 아픔의 골짜기를 지나야했다. 그때 서울에는 경기여중을 비롯한 공립 중학교가 5개가 있었다. 공립이 사립보다는 등록금이 저렴했다. 나는 그 중에서 집에서 가장 가까운 수도여중에 원서를 내고 입학시험을 치렀고 합격을 했다. 합격자 예비소집에 가니 입학금과 1기분 등록금 고지서를 주었다. 그것이 그때 돈으로 4만환이었다. (61년에 화폐개혁이 되어 10환이 1원으로 되었다) 지금 화폐로 치면 4천원인 셈이다. 물론 화폐의 가치는 많이 달라졌지만 그래도 그때 당시 그렇게 큰돈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우리집은 가난해서 그 돈이 없었다. 어머니는 동네방네 다니면서 그 돈을 빌리려고 애쓰셨지만 결국은 구하지 못하셨다. 

마침 그때 신문에 장학생 모집 광고가 났다. 오빠가 이를 보고는 나에게 그 학교에 원서를 넣으라고 했다. 그 학교는 내가 합격한 학교 앞을 지나서 30분쯤 더 걸어서 언덕 꼭대기 해방촌에 있는 보성여중이었다. 이 학교는 역사와 전통이 있는 학교였지만 이북에 있다가 이남으로 내려온 학교라 후기 모집학교에 속해서 실력 있는 학생들을 모집하고자 선배들이 장학금을 모아 장학생을 선발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내게는 입학금과 등록금을 내지 않고도 공부할 수 있는 그런 기회인 것이었다. 

나는 사촌 올케언니와 같이 그 학교를 찾아갔다. 수도여중에 합격하였으나 등록금이 없어서 장학생으로 입학하고 싶어서 왔다고 하니 볼 것도 없이 합격이었다. 그래도 교복은 입어야 하는데 교복 살 돈도 없었다. 마침 큰 언니가 바느질 솜씨가 있어서 그나마 한 푼의 돈도 들이지 않고 다른 사람이 입던 교복을 뜯어서 내 몸에 맞게 고쳐주었다. 가방은 큰 형부가 사 주셨다. 나는 수도여중학교에서 준 그 고지서를 고이 간직하고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면서 아픔의 강을 건너 중학생이 되었다. 

어머니는 나를 학교에 보내 놓고는 부뚜막에 앉아서 우셨다고 옆집 아주머니한테 들었다. 남들은 합격을 못해서 못 보내는 학교를 우리 막내딸은 합격을 했어도 돈이 없어 못 보낸다며 우셨단다. 나는 어머니에게 오히려 위로를 해드렸다. “어머니, 용의 꼬리가 되는 것보다는 뱀의 머리가 되는 것이 더 낫대요”라고. 이 말은 6학년 담임선생님이 내게 해 주신 말씀이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상도동에 있는 상도장로교회에 다녔다. 그때 담임 목사님의 딸이 나와 같은 반이었다. 그 애는 이화여중에 갔다. 또 6학년 담임선생님의 딸도 나와 같은 반이었고, 나와 같은 학교에 입학시험을 치렀다. 그래서 입학시험 보는 날 담임선생님이 시험장에 오셨었다. 선생님도 내가 합격한 것을 아셨고 돈이 없어 입학하지 못하는 것도 아셨다. 목사님 댁에도 몇 번 놀러간 적이 있는지라 관심을 가졌다면 딸과 같은 반 친구가 어려워서 입학하지 못하는 것을 아셨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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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내 마음이 아픈 것은 매일 아침, 같은 버스를 타고, 같은 정거장에서 내려, 친구는 수도여중으로 들어가고 나는 그곳을 지나쳐 걷고 또 걸어서 꼭대기에 있는 학교까지 가야만 하는 현실이었다. 나는 이 아픔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혼자서 속으로 삭이었다. 

보성여중에서의 중학생활은 즐거웠다. 늘 선생님의 사랑을 받았고 친구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또 미션스쿨이어서 예배로 조회를 하는 날이 있었고, 무엇보다 성경과목이 있어서 좋았다. 성적표에 모든 과목보다 가장 앞에 성경과목이 적혀있을 정도로 신앙중심의 교육을 받았다. 성경시간이 좋았고 거의 만점을 받다시피 했으며 많은 믿음의 성장이 있었다고 본다. 또 1학년 때 짝으로 만난 친구와 오랜 우정을 지속해 왔다. 그 친구를 만난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 

나는 대학을 갈 수 있는 형편이 아니어서 실업학교를 택해야 했으므로, 고등학교는 서울여상을 지원하여 합격을 했다. 졸업 후에 6년간 직장생활을 하다가 결혼을 하였다. 그때는 아무리 좋은 직장이라도 여자는 결혼을 하면 퇴직을 해야 하는 것이 사회 통념이었다. 또 기혼자가 다시 직장을 가진다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이었다. 

아들을 대학에 입학시키고 등록금을 걱정하던 때, 중1학년 때 짝이었던 그 친구가 자기 동생이 운영하는 철강 대리점에 나를 추천해 주어서 다시 직장을 갖게 되었고, 아들의 대학학비걱정은 사라지고 용돈도 달라기 전에 미리 채워주기까지 했다. IMF가 터지기 바로 전인 97년 8월에 부도를 내면서 6년간의 직장은 마감을 했다. 지나고 보니 참으로 하나님의 법칙은 오묘하다. 돈이 없어 억지로 가야만 했던 중학교였는데 그곳에서 만난 친구를 통해 6년간의 직장을 주셨고, 내가 가고자 했던, 모든 사람들이 직장이 보장된다고 하는 학교 졸업을 통해 6년간의 직장생활을 했다.

그 옛날, 내가 다음세대였을 때, 내가 아픔의 강에서 헤메일 때, 누군가가 돈 4만환(지금의 4천원)의 씨앗을 내게 심어 주었다면 나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우리 강남교회는 다음세대를 위한 목회를 하고 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내가  다음세대였을 때, 그때 교회가 조금이라도 다음세대에 관심을 가졌다면 지금의 한국교회의 모습은 어떻게 되어있을까? 다음세대의 묵상을 주도하고, 장학금을 지급하고, 비전씨앗심기를 실천해 나가는 이러한 계획과 포부들이 참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란 것을 안다. 나는 눈물이 날만큼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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