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2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4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5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6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
9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사도 요한은 생의 마지막에 가까운 시간 속에서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가장 긴급하고도 중요한 진리를 간곡히 전하고자 했습니다. 그것은 단지 이론적인 교리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실제로 보고, 듣고, 손으로 만졌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생생한 증언을 통해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히고자 했습니다. 요한은 이 모든 증언이 단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선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고, 다시는 죄의 종으로 살지 않게 하셨다는 복음을 온전히 전하려는 것입니다(1).
요한이 말하는 죄는 단지 행위의 차원을 넘어서 삶의 지배적인 방향과 태도를 말합니다. 인간은 본질상 죄 가운데 태어나며, 죄 아래 종처럼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이 죄의 본질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 뜻을 거스르며, 자기 욕망을 기준 삼아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이러한 죄의 자리에서 우리를 건지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고난당하셨으며,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속죄의 제물이 되어 주셨습니다. 이 대속의 사건을 통해 우리는 의롭게 되었습니다. 단지 죄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어야 할 죄인이 오히려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으로 여김을 받게 된 것입니다(1).
그러나 이 구원은 단순히 죄의 용서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그 순종이 불의한 우리를 의롭게 만든 것입니다(1). 더 놀라운 것은 그분의 희생이 단지 나 개인의 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셨다는 사실입니다(2). 이는 죄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된 인류의 역사를 다시 연결하시고, 깨어진 피조세계를 회복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체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죄에서 자유함을 얻습니다. 죄의 사슬에 묶여 있던 종의 자리에서 해방되어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요 3:16).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깊이 유의할 것이 있습니다. 죄에서 자유함을 얻었다는 것은 결코 죄에 대해 무감각해지거나 죄를 마음껏 지어도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죄에 대하여 깨어 있는 자가 되고, 죄를 미워하고, 죄를 다스릴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선언입니다. 바울 사도도 말합니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라”(롬 6:14). 이제 성도는 죄를 거부할 수 있는 권세를, 하나님의 은혜로 부여받은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 줄 알면서도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자유를 오용하는 것이며, 더욱 심각한 죄의 자리에 머무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구원의 표지로 '하나님을 안다'는 고백을 말합니다. 하지만 그 고백이 단지 말로만 그칠 수는 없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3). 즉,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야말로 하나님을 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성경 지식을 많이 알고 있다거나, 신학적인 언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의 본질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분과의 인격적이고도 순종적인 관계 속에서 드러납니다(3). 그분의 뜻을 깨닫고 그 뜻에 따라 살아가려는 실천적인 태도야말로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입니다.
요한은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를 안다고 말하면서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그 속에 진리가 없는 자”라고 단호히 말합니다(4). 이는 매우 강경한 표현이지만, 요한은 진리에 대한 거짓된 태도에 대하여 결코 양보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진리를 가르치신 분이 아니라, 그 자체가 진리이셨기 때문입니다(요 14:6). 그러므로 진리 되신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신다면, 그분의 말씀에 불순종하며 살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그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졌다고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5). 말씀을 실천하는 삶은 단지 신앙의 열매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다시 말해, 말씀에 순종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살아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온전하게 되었다’는 것은 더 이상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통해 완전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선언입니다. 이러한 선언은 단지 개인의 고백이 아닌, 공동체와 세상을 향한 강력한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구원받은 백성답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나를 드러내고 자랑하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 지식은 나를 낮추고, 말씀에 순종하며, 삶으로 하나님을 드러내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는 자는 그 지식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며, 그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입니다. 그 길은 겸손과 희생, 그리고 순종의 길이었습니다.
요한은 또한 공동체 안에서의 사랑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삶을 구체화합니다. 그는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다”고 말합니다(10).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백성은 서로 사랑함으로써 진정 빛 가운데 거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요 13:34). 이 사랑은 감정이나 조건이 붙은 사랑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과 같은 희생적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미워하고 다투며 사랑하지 않는 삶은 결코 빛 가운데 거하는 삶이 아닙니다. 그런 자는 아직 어둠 가운데 있으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아직까지 그 안에 빛이 없는 자입니다(9). 참된 구원은 반드시 사랑의 실천으로 열매 맺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입은 자라면, 마땅히 형제를 위해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지 않음은 곧 미움이며, 미움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형제를 원수로 보는 죄입니다. 결국 이는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이 되며, 공동체를 병들게 하는 독소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자신의 백성을 사랑하셨습니다. 애굽에서 종 되었던 백성을 건져내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 사랑은 성경의 처음부터 끝까지 흐르는 하나님의 본질이요, 구속사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의 능력으로 완성된 것입니다(7-8). 오늘 우리가 그 사랑을 실천할 때, 바로 그 자리가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미워하고 다투었던 형제와 화해하고, 사랑으로 하나 되어 하나님의 뜻을 함께 세워나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안다는 고백의 실체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