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 내가 걸어 온 길
우리의 삶의 여정에서 우리가 걸어온 길은 어떤 모습일까요? 철저히 무너진 여리고 성과 그곳에서 부르짖는 맹인 바디매오의 모습은 우리의 영적 상태를 반영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폐허와 같이 회복될 수 없는 땅에서도 믿음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그곳에서 새 생명을 허락하십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세상의 소리에 묻혀 무리 중 한 사람으로 지나온 길인지, 아니면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가려 했던 길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확증하기를 원하시며, 우리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여리고에 이릅니다. 철옹성과 같았던 여리고는 다시 재건할 수 없을 정도로 폐허가 된 것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여리고를 정복한 후에 맹세하며 “누구든지 일어나서 이 여리고 성을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그의 맏아들을 잃을 것이요 그 문을 세울 때에 그의 막내아들을 잃으리라”고 말하였습니다(수6:25). 스스로 회복될 수 없는 땅 여리고, 그 여리고는 하나님의 뜻에 대항하다 철저히 무너진 땅이었으며, 그의 후손들은 유리하며 구걸하는 걸인들이 되어 흩어졌습니다(시109:10). 또한 여리고는 예수님께서 들어가셨다가 아무런 이적도 행하지 않으시고 그냥 나오실 정도로 믿음의 반응이 없던 영적으로 죽은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여리고에서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라는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를 지릅니다(46-47). 맹인 바디매오는 스스로 삶을 세워갈 수 없는 비천한 자입니다. 여리고의 절망적 환경 속에서도 그는 예수님을 구원자로 부르짖었습니다. 이는 믿음이 단순히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도구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행위임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의 비난과 방해 속에서도 예수님께 부르짖은 그의 모습은 믿음이란 외부 환경을 넘어선 내적인 결단임을 가르쳐줍니다. 그의 부르짖음이 따르는 많은 무리들로 인해 가려지는 듯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셨습니다(49). 많은 재물을 가졌고, 율법을 준수하였음에도 결국 예수님을 주님으로 맞아들이지 못했던 부자 청년과 달리(10:22),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맹인은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47). 주님께서는 부르짖는 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고, 그의 곁에 머물러 서실 것입니다. 주님은 많은 사람들의 호위와 칭송을 받으러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상처받고 헐벗은 가난한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하십니다(49). 여리고에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지만, 그의 아픔과 상처를 치료해주고 돌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한 맹인 바디매오는 예수님만이 유일한 소망이었으며 구원자이심을 알았기에 모든 사람들이 꾸짖음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부르짖은 것입니다.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부르짖는 사람은 그를 향해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자신을 부르시는 예수님을 향해 자신의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나아갑니다(50). 믿음은 종종 우리 삶의 소중한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 결단을 요구합니다. 겉옷은 바디매오의 유일한 소유였지만, 그는 그것이 예수님께 나아가는 데 방해가 된다고 깨닫고 과감히 벗어던졌습니다. 이는 우리 삶의 모든 의지와 방식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믿음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또한, 바디매오에게 겉옷은 ‘구걸의 상징’이었습니다. 즉, 사람들을 의지하며 연명을 해왔던 그가 이제 예수님께 자신의 삶을 온전히 맡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디매오를 향해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51). 바디매오는 주저하지 않고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소리칩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불행의 근원이 보지 못하는 것에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 따라다녔지만(46), 정작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 이르지 못하였고, 자기 인생의 문제가 무엇인지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맹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졌으며(52), 자기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유일한 해결책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의 유일한 소유이며, 삶의 방향성이었던 겉옷을 과감히 던져버리고 새로운 인생으로 시작할 수 있는 변화를 얻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바디매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신 것은 그의 믿음을 스스로 확증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이미 아시는 것을 구체적으로 고백할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대답하였고, 예수님께서는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52). 바디매오는 거지이며 맹인으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가진 유일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믿음’이었습니다. 그 믿음이 수많은 장애물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로 나아오게 하였고, 부르짖게 하였으며, 지나가는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어 서게 한 것입니다.
제자들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었지만, 여리고의 주인공은 맹인 바디매오입니다. 이제 길 가에 앉았던 그가 보게 되어 예수님을 길에서 따르게 됩니다(52). 길에서 앉아 구걸하던 바디매오가 길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따라가고 있습니다. 같은 길, 같은 환경, 그러나 바디매오의 삶은 완전히 바뀌어 있습니다. 길 위에서 영광의 자리를 구하던 제자들에게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말씀하셨던 예수님께서(38), 길 위에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 온 맹인 바디매오에게는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51). 믿음의 길은 영광을 추구하는 길이 아니라, 고난과 헌신을 통해 영적 열매를 맺는 여정임을 깨닫게 합니다. 오늘 나의 부르짖음에 주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대답하실까요? 그 전에 내가 지금까지 걸어 온 길이, 허다한 무리 중의 한 사람으로서 온 길인지, 믿음으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부르짖었던 길이었는지를 돌아보아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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