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이슬묵상

마가복음 11:1-11 /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다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해원
댓글 0건 조회 46회 작성일 25-03-01 20:42

본문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4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5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6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7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8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10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 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니라


■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지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에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두 제자를 보내시며,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고 말씀하십니다(1-2). 이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만왕의 왕으로 오실 메시야이심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일찍이 야곱은 그의 유언에서 나귀를 타고 유다지파로부터 통치자가 나올 것을 언급했으며(창49:10-11), 스가랴 선지자는 구원을 베푸실 공의로운 왕께서 겸손하게 나귀를 타고 오실 것을 예언했기 때문입니다(슥9:9).

예수님께서는 만일 누가 왜 이렇게 하느냐고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고 말하면 즉시 보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3). 예수님께서 두 제자들에게 나귀를 가져오라 명령하신 것은 단지 나귀가 필요하셔서 심부름을 시키신 것이 아닙니다. 구약의 메시아에 관한 예언이 예수님으로 인해 성취됨을 제자들로 하여금 직접 경험케 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남의 것을 가져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가 쓰시겠다”고 하심으로, 그것이 ‘주님의 것’임을 분명히 하신 것이며,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고 하심으로, 그 명령 앞에 ‘복종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명령은 자신이 메시아이심과 모든 만물의 주인이시며 왕 되심을 제자들에게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나의 상황에 맞지 않고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말씀 앞에서도 잠잠히 순종해야 합니다. 믿음은 우리의 이성이나 감정을 뛰어넘는 하나님과의 신뢰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순종은 단순히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결단입니다. "하나님께로 향하는 길은 항상 순종을 통과한다"는 명언처럼, 우리가 순종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의 삶 속에서 완전하게 드러납니다. 제자들은 순종하므로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6).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그가 만왕의 왕이시며 지극히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셨음을 증거 합니다(사62:11). 제자들은 그러한 예수님께서 명하신 대로 순종하여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예수님께서 타도록 하였습니다(7). 겉옷을 벗어 다른 사람에게 입히는 행위는 권위와 능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왕하2:8, 사3:6). 바로가 요셉에게 세마포를 입힌 것은 요셉의 권위가 상승되었음을 의미했습니다(창41:42).

제자들은 나귀를 끌고 오라 하신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므로 단순히 나귀를 구하기 위한 심부름이 아니라, 만왕의 왕이며 메시아이심을 경험하고 그들의 겉옷을 나귀 등 위에 얹어서 예루살렘 입성을 준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겉옷을 벗어 예수님께서 타실 나귀 위에 얹었다는 것은 종의 자세로 온전한 복종의 마음을 담아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며 존귀케 하는 행위였습니다. 또한, 제자들이 나귀 새끼를 데려와 등 위에 겉옷을 얹은 행위는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실 것임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증거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더 좋은 것을 타실 것을 제안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오직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성경을 읽으며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신 것보다 준마를 타신 것이 더 어울릴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과 같이,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이는 합리성과 편리함은 종종 하나님의 뜻을 왜곡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우리의 이해를 초월합니다. 나귀를 타고 오시는 예수님은 겸손과 순종의 모델이십니다. "좁은 길이지만 그 길이 생명의 길이다"라는 말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길이야말로 참된 생명과 은혜의 길입니다. 

사울은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얻은 전리품 중에 가장 좋은 양과 소를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기 위한 제물로 사용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울의 생각은 명목상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그의 행동은 매우 신앙적인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르며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하는 것은 위선이며 교만입니다. 그러한 사울을 향해 사무엘 선지자는 “말씀에 청종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책망하였습니다(삼상15:22). 우리는 말씀 앞에 순종하고, 그 권위 앞에 엎드려 오직 주님만이 만왕의 왕이심을 드러내야 합니다.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폈습니다(8). 그리고 예수님의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를 지르며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를 외쳤습니다(9-10).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의 이적을 보고 말씀을 들으면서 쫓아왔던 많은 사람들이 메시아께서 예루살렘에 오심을 찬송하는 노래를 부르며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시118:22-26).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뒤로하고 홀로 계시기를 원하셨고(마14:23), 제자들에게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말씀하신 이후에(마16:21), 비로소 모든 세상 가운데 만왕의 왕이 되심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만백성의 환영은 예수님께 이스라엘의 왕으로서의 예를 다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외형적 영광이 아닌 내적 순종과 헌신을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진정한 길은 세상 사람들의 칭송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한 순종으로 열린다"는 교훈을 되새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셔서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열두 제자를 데리고 베다니로 가십니다(11). 예수님께서 성전을 둘러보신 것은 성전의 주인으로서의 감찰하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며 수많은 군중들의 환영과 찬송을 받았지만, 예수님께서 성전을 둘러보실 때에 “때가 이미 저물었다”는 것은 향후에 있을 성전 청결 사건과 더불어 얼마나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피폐한 상태였는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수많은 군중도, 열렬한 환호도 아닙니다. 성전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정작 군중과 환호는 있으나 그 안에 진리 되신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는다면 이미 “때가 이미 저문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서 기적을 행하시거나, 병 고침을 위한 사역을 행하시거나, 말씀을 전하시지 않으십니다. 그저 둘러보시고 베다니로 떠나십니다. 군중과 환호는 있으되 진정한 예배를 잃어버린 곳에서 예수님은 발길을 돌리십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