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역자이야기

낙타고개 / 김봉연 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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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해원
댓글 0건 조회 66회 작성일 25-01-14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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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84년부터 한국시각장애인 복지관에서 자원봉사를 시작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장애인들에게 책을 읽어서 녹음테이프나, MP3, 또는 CD로 제작해 그들에게 대출을 해주는 일인데, 나는 그 처음 단계인 책을 소리 내어 읽어서 녹음하는 일을 한다. 컴퓨터가 있는 방음이 된 작은 공간에서 서너 시간을 꼬박 책만 읽는 일이다. 

기독교 방송을 듣다가 이런 자원봉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매일의 생활에 얽매여 이웃에게 눈 돌릴 틈도 없이 살아온 내게도 자원봉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고 생각되어 기뻤다. 내가 사는 곳은 성내동이고 복지회관은 상일동으로 같은 강동구라서 거리도 가까워서 좋았다.  

녹음 부스가 지금은 시설이 좋아져서 방마다 에어컨이 나오지만 초창기에는 좁은 공간이라 소리 때문에 선풍기도 못 켜고 더워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녹음을 했다. 그 한 평도 안 되는 작은 방이 나에게 커다란 보람과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그 방에서 나만이 갖는 평화로움을 느낄 때가 많다. 나만의 왕국이랄까. 혼자이면서 혼자가 아닌, 책 속의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를 통해서 지혜가 쌓여가는 작은 천국이었다. 평소에 잘 접할 수 없었던 많은 책을 정독하게 되는 특혜도 누렸다. 독서량이 늘어가면서 내 놓을만한 것은 못되지만 많은 시간의 자원봉사 이력이 쌓여갔다.

그 작은 방에서의 독백이 녹음이 되어 그들만의 소중한 책이 되어 나온다. 수험생을 위한 문제집 녹음 도서로 열심히 공부하여 대학 입시에도 합격하고, 사법고시를 위한 법률 책을 듣고 사법고시에 합격한 사람도 있다. 얼마 전에는 시각장애인이 뉴스 앵커가 되기도 했다. 유명한 시각장애인 강영우 박사도 녹음 도서로 공부해서 아주 훌륭한 인물이 되었다. 그 방은 작고 좁지만 그 안에서 책을 읽을 때 새로운 힘과 활력을 충전할 수 있어서 나는 그 방을 소중히 여겼다.    

복지관에 가려면 일명 낙타고개를 넘어야 했다. 고개가 연이어 두 개가 있어서 낙타고개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 고개를 자전거를 타고 넘는데 함께 가겠다는 아들을 뒤에 태우고 다녔었다. 오르막길을 힘들게 올라가면 그 다음은 페달을 밟지 않고도 신나게 내려가고, 그 힘으로 조금 낮은 고개를 쉽게 넘어갔던 기억이 새롭다. 그 세월이 얼마나 오래 되었는가. 그때 초등학교 5학년이던 아들이 그만한 딸을 둔 아빠가 된 2016년까지였으니…. 

그 세월 동안 내 인생의 길도 많은 낙타고개를 넘었다. 때론 힘들고 버거운 오르막길을 올라갔고, 또 어느 때는 페달을 밟지 않고도 저절로 굴러가는 내리막길을 지나왔다.   

젊었을 때는 환갑이 될 때까지 낭독봉사를 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이미 그 나이가 지난 지 오래되었다. 복지관에서 햇수로는 가장 오래된 자원봉사자가 되었다. 강진으로 귀촌할 때 복지관에서는 특별히 나를 위한 송별회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그대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한 삶은 헛되지 않으리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것은 보이거나 만져지지 않는다. 

단지 가슴으로만 느낄 수 있다. (헬렌켈러의 ‘가슴으로 느껴라’ 시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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