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팀을 하면서 매일 긴 머리를 하나로 단정하게 땋아서 묶고 흰 남방에 검정 치마를 입고 큰 성경 가방을 손에 들고 상냥한 얼굴로 다녔는데 만나는 사람들마다 전도사냐고 물었다. 후일 실제로 전도사로 사역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마치 쓰시기 위한 훈련을 미리….
경제적인 바닥일 때, 외식이나 화장품, 옷을 사 입을 수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나를 보며 빛이 난다고 했다. 화장품을 어떤 것 쓰냐며 묻곤 했는데 영생수를 쓴다고 하니, 그런 화장품도 있냐고 다시 묻곤 했다. 주식회사 하늘나라라고 하면 그제야 알고 한바탕 웃는 일도 있었다.
그땐 누군가 준 샘플들, 받은 화장품들을 닥치는 대로 썼다. 또, 주변에서 잘 어울릴 것 같다며 예쁘고 멋진 옷들을 주셔서 넘쳐났다. 아이들이 뭔가 먹고 싶다고 하면 그 다음날 누군가가 집에 방문하시는데 꼭 그것을 사주거나 사들고 왔고, 쌀이 떨어질 쯤엔 누군가 쌀자루를 놓고 가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비참하거나 창피하거나 부끄럽지 않았다. 낙천적인 성격의 영향도 있었지만 그것마저도 하나님께서 주셨고, 은혜를 누리니 무엇을 발라도 뾰루지가 나지 않는 피부도 감사했고, 어떤 옷을 주셔도 잘 맞는 표준 사이즈도 감사했고, 어찌 아이들이 자장면이 먹고 싶다 피자가 먹고 싶다 그 말을 들으시고 바로 응답해주심에 매일매일 간증이 넘쳤다. 내 인생 깊은 궁핍의 때 누린 은혜였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사람은 사랑할 대상이지 의지할 대상이 아니다. 사람에게 상처받고 실망하던 때였다. 그 누구에게도 쌀이 떨어졌거나 공과금이 체납되는 등, 내가 겪고 있는 일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늘 웃고 다녔다. 사람들은 내가 근심도 없고 평안히 잘 사는 이라 생각했다. 나는 그때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 말을 안 할 뿐이지 사람마다 집집마다 말 못할 사정이 있음을 깨달았다. 보이는 것으로 사람을 판단치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새벽예배 다녀와 아이들 학교에 보내고 전도팀 사역을 한 후, 점심은 건너뛰었다. 아직 어린 아이들이 오는 시간 전 집에 도착해 있도록 3-4시간 일할 순 없을까 고민했다. 그러던 중에 집사님 한 분이 전단을 붙이면 그날 바로 돈을 받을 수 있다고 해서 그 일을 했다. 아파트 경비에게 쫓겨나기도 하고 계단 오르내리길 반복했다. 500장을 붙이면 오천 원에서 만원을 받았다. 아이들 좋아하는 간식을 사고 아침 된장국에 넣을 두부 한 모를 사며 감사하고 행복했다. 남편이 가끔 설교 때 전단을 붙이고 온 아내의 발을 씻기며 울었던 때를 말한다. 그때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안에서 더욱더 단단해져 가는 내 인생 30대 후반에 있었던 일이다.
8-9시 밤 기도회가 일 년 동안 있었다. 예배당에 가서 부르짖고 통성으로 기도를 했다. 매일 밤 부르짖고 기도했다. 병원에선 성대 결절이라고 당분간 조심하라고 했다. 그러나 기도의 자리에선 나도 모르게 통성으로 기도하고 있었다. 찬송을 잘 부른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마침내 고음 불가의 저음 목소리로 변해버렸다. 그러지 않으리라 다짐하지만 기도시간만큼은 내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 호소하고 싶었다. 매일매일 도와주셔야 살 수 있다고, 매일 매일 은혜가 필요하다고 소리 높여 외치고 목청껏 찬양했다. 그때는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내 인생 가장 깊은 구덩이 속에서 나는 그렇게 하나님께 올인 했다. 새벽부터 밤 기도회까지…. 내가 의도하진 않았지만 기도와 말씀과 찬송이 좋았고 예배와 교회가 좋았다. 돌아보면 하나님께 딱 붙어있어서 버텨냈고 이겨낼 수 있었고 그 고난의 터널을 통과할 수 있었다. 나는 강한 믿음의 사람이 아니다. 나의 의지와 믿음이 아니라 믿음에서 믿음으로, 성도를 견인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였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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