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역자이야기

차창 밖 / 김봉연 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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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남교회
댓글 0건 조회 36회 작성일 25-04-04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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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북한산 인수봉에서 산악인들이 사고로 인해 바위에 매달린 채 추위와 강풍에 얼어 죽은 사건이 발생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날은 유난히도 추웠다. 나는 그날 오빠와 오빠 친구, 나와 내 친구, 넷이서 작품 사진을 찍는다고 안양의 어느 시골 마을로 갔었다. 

돌과 흙이 조화를 이룬 투박한 담장이 배경이 되어 강아지도 모델이 되었고, 나와 친구도 담장 일부가 된 것처럼 작품 속에 찍혔다. 날씨는 우리의 작품을 시샘하는지 점점 더 매서운 바람으로 휘몰아쳤다. 넷이서 빙 둘러앉아 바람을 막아주며 간신히 라면을 끓여 먹고 나니 몸은 좀 풀렸지만, 해가 지면서 기온은 자꾸만 수은주의 빨간 기둥을 땅 쪽으로 잡아당겼다. 하는 수 없이 일찍 귀갓길에 올랐다. 집에 오니 텔레비전에서 인수봉 등산대원들의 가슴 아픈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오빠는 고등학교 졸업식 때 아무도 사진을 찍어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앨범 말고는 졸업사진이 없다. 그것이 마음의 상처로 남아서, 졸업한 후 교사로 발령을 받아 월급을 타서 처음 산 것이 카메라였다. 그로부터 카메라와 친숙한 인연이 되었고, 나도 오빠를 자주 따라다니며 사진 찍는 것을 배웠다. 친구들과 놀러 갈 때에는 오빠 카메라를 빌려 갈 수 있게 되었다.

어느 날, 안성에 있는 포도밭으로 놀러 갔다. 고속버스를 타고 갔다. 나는 운전석 바로 뒷자리에 앉았다. 앞으로 쭉 뻗은 고속도로가 한눈에 들어왔다. 고속도로가 생긴 지 얼마 안 되는 때인지라 차도 별로 없었다. 먼 곳까지 앞이 환하게 보였다. 내가 앉은 좌석에서 앞에 보이는 풍경을 그대로 카메라에 담았다.  

매달 『여성동아』에서 <이달의 독자 사진>을 공모했다. 시작이 반이라는 생각으로 응모 해보기로 했다. 고속버스의 운전석 뒤에서 찍은 사진을 포함해 석 장을 보냈다. 첫 응모라 당선하리라는 기대는 전혀 하지 않고, 앞으로 사진 찍는 실력이 더 좋아지면 언젠가는 나도 한 번 당선 되어 보리라는 꿈을 꾸었다.

까맣게 잊고 있던 어느 날, 사진 모델로 함께 갔던 친구가 “네 사진이 여성동아에 특선으로 뽑혔어.”라며 내게 전화를 했다. 전혀 예상도 못했던 당선소식에 매우 기뻐서 퇴근할 때 서점에 들려 『여성동아』를 샀다. 

상금은 특선 한 점에 오천 원, 가작 두 점에 각각 일천 원이었다. 상금이 문제가 아니었다. 특선에 뽑힌 것만으로도 좋아서 날아갈 것만 같았다. 오빠와 오빠 친구는 ‘그 추운 겨울에 같이 사진을 찍으러 다녔는데 혼자만 응모하여 특선을 했다’며 축하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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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독자사진 콘테스트/  특선/ 「차창 밖」 <시원스럽게 뻗은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버스 안 좌석에서 재미있는 구도로 포착했다. (····) 특히 재미있는 것은 버스의 앞 윈도의 필터용으로 코팅한 부분만 구름이 선명하게 표현되고 나머지 부분은 하이키 하게 표현된 점이다> 

우편환으로 받은 상금을 환전하여 그때 사귀고 있던 사람과 명동에서 만났다. 당시는 그 상금으로 명동에서 멋진 식사를 할 만했다. 테이블마다 예쁜 유리그릇에 양초 불이 켜져 있고, 작은 화병에 꽃이 꽂혀있는 근사한 레스토랑이었다. 그 사람은 내가 사진 콘테스트에서 특선으로 받은 상금으로 마련한 자리인 것을 아는고로 “여기 있는 모든 사람 중에서 내가 가장 행복한 사람인 것 같네요.” 라고 말했다. 나도 그 레스토랑에 있는 어느 사람보다 행복하다고 스스로 자부했다. 

다음 해에 그 사람은 내 남편이 되었다. 행복하려고 결혼을 했는데 결혼은 행복의 무덤이 되고 말았다. 26년간의 삶의 여정은 다시 돌이킬 수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치닫듯이 막막하고 괴로울 때가 많았다.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던 그는 행복을 멀리 더 멀리 쫓아내려는 사람 같았다. 생각조차도 못해 보았던 폭력과 폭언으로 받은 많은 상처, 그 상처로 인한 아픔은 친정에도 말하지 못한 채, 나 혼자 쓸어안고 살아야 했다. 그는 ‘칼로 물 베기’를 자주 하자 했고, 그 물은 점점 차가워져 얼음 덩어리가 되고 말았다. 그 얼음은 결국 합쳐지지 못한 채 두 동강이 났다. 그래도 따뜻한 봄날이 되면 얼음이 녹아 다시 합쳐질까 하여 6년을 더 견디며 살아보았지만, 결혼한 지 32년 째 되는 해에 그는 아주 떠나갔다.

그 후로 나는 혼자의 힘으로 살아냈다. 이사도 혼자서 했고, 망치로 못을 박을 수도 있다. 아들을 결혼시켰고, 귀여운 손녀도 둘이나 있어 기쁨을 선사받는다. 

사진작품 속에서 차창 밖을 다시 내다본다. 그동안 나는 얼마나 먼 길을 달려왔는가. 평탄하고 쭉 뻗은 고속도로만 달려온 것은 아니었다. 버스의 앞 윈도의 선명하게 보이던 구름이 검은 먹구름으로 변해 천둥과 번개를 내리치며 소나기를 퍼붓기도 했다. 굽어진 길도 있었고, 오르막길과 내리막길도 있었다. 차량이 점점 많아지면서 교통체증도 생겼고, 때로는 속도를 내며 끼어들기를 하다가 원치 않는 교통사고도 났다. 

이제는 사고의 현장도 말끔히 치워졌으며, 다시 원활한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다. 다시금 하늘에는 태양이 비치고, 선명하게 보이는 구름이 화사한 얼굴로 내게 다가온다. 언제 천둥 번개가 있었냐는 듯이.

작품 속의「차창 밖」은 여전히 쭉 뻗은 채 평온하다. 사진 콘테스트 당선의 기쁨을 행복의 테이블에 올려놓았던 그때처럼, 지금의 내 마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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