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역자이야기

비움, 그 정숙함 앞에서 / 안병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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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남교회
댓글 0건 조회 36회 작성일 25-04-04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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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스며들고 있습니다. 나무들은 한 해 동안 햇빛과 비를 머금어 자라나며, 이제는 그 열매를 내어주고 잎을 내려놓습니다. 마치 오랜 시간 감추고 있던 이야기들을 조용히 털어놓듯, 나무는 바람에 그 고요한 휘파람을 불며 자신을 비워갑니다. 이때쯤이면 추수감사절이 찾아옵니다. 한 해의 결실에 감사하며, 그 결실 뒤에 계신 하나님의 손길을 묵상합니다. 그러나 이 풍성한 계절 속에서 문득 나는 묻습니다. 내 영혼도 이처럼 풍요로운가?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 질문은 마치 거울처럼 나를 비춥니다. 그 속에서 나는 나의 욕망, 두려움, 집착을 마주합니다. 나의 삶이 매달린 가지 끝에는 세상의 욕심과 염려가 무겁게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고백은 너무나 담담하고 강렬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는 그 말의 무게가 나의 가슴을 짓누릅니다. 내가 진정으로 잃어버릴 준비가 되었는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분만을 따를 용기가 내게 있는가?

가을의 나무들은 그 비움을 본능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잎사귀들이 하나둘씩 떨어져 나가고, 그 잎사귀들이 마른 땅 위에서 서서히 바람에 날리는 순간, 나무는 자신을 완전히 비워내기 시작합니다. 그들의 비움은 곧 새로움을 준비하는 몸짓입니다. 잎이 떨어지면서 나무는 그들의 뿌리를 더 깊이 숨겨두고, 다가올 혹독한 겨울에 대비합니다. 나는 이 장면 속에서 묵상합니다. 나도 나무처럼,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 그분께 온전히 맡기며, 내 영혼의 깊은 곳까지 비우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가을은 풍성함의 계절이지만, 동시에 비움의 계절이기도 합니다. 나무가 자신의 영광을 내려놓을 때, 그 안에 진정한 강인함이 숨어있듯이,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연약한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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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면서부터 움켜쥐려는 본능을 가지고, 평생을 그것에 매여 살아갑니다. 그러나 움켜쥠이 때로는 영적인 가난을 불러옵니다. 우리는 내 것을 붙잡으려다 그분의 은혜를 놓치고, 더 채우려다 오히려 영혼이 비어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곤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장 11절과 12절에서 말합니다.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바울의 이 고백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만나게 되는 모든 계절을 담고 있습니다. 그의 삶은 화려했던 과거를 내려놓고, 그리스도를 위해 스스로를 비운 삶이었습니다. 그 속에서 바울은 오히려 영혼의 풍성함을 경험했습니다. 그의 삶은 마치 가을 나무처럼, 깊고 조용한 결단 속에서 자신을 내어주고 새로운 생명을 품었습니다.
"잃어버리고" 라는 단어가 내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킵니다. 그것은 단순한 포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손에 나의 모든 것을 맡기는, 영적인 춤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 춤은 두려움 속에서도 자유롭고, 의심 속에서도 담대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내려놓을 때, 그 빈 자리에 하나님께서 채우실 은혜와 평안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이 가을, 나는 눈에 보이는 수확의 풍성함 너머로 영적인 결실을 바라보며, 내려놓음의 기쁨을 누리고 싶습니다.
떨어지는 낙엽을 밟으며 나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바삭거리는 소리는 마치 오래된 기억을 걷어내는 듯합니다. 낙엽이 하나씩 떨어져 나갈 때마다, 내 마음속에 오래 붙들고 있던 것들도 함께 흩어져 나가는 느낌입니다. 그 순간 나는 깨닫습니다. 하나님께 나의 모든 것을 드리는 이 내려놓음의 시간이야말로, 영혼의 가장 충만한 순간일 수 있다는 것을.
가을은 비움의 예술입니다. 나무는 잎사귀를 떨구고, 바람은 그 잎사귀를 데려갑니다. 그리고 남겨진 것은 고요하고 빈 공간입니다. 그 공간에 무엇이 새롭게 채워질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 고요함 속에서 하나님의 발자국 소리를 기다립니다. 나의 영혼이 완전히 비워질 때, 그곳에 그분의 사랑과 은혜가 깃들 것을 기대하며, 나는 이 가을의 끝자락에 서서 조용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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