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32 서기관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34 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 사랑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우리의 삶에는 항상 무엇이 더 중요한지에 대한 선택과 고민이 있습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 우리는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것, 업무의 성과를 내는 것, 혹은 개인적인 성취를 이루는 것 중 무엇이 우선인지 갈등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선택은 단순한 우선순위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의 중심이 무엇인가를 드러냅니다. 이처럼 삶의 중요한 문제들 앞에서 우리는 종종 무엇이 진정으로 가장 중요한 것인지 혼란스러워합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한 서기관도 이러한 질문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율법과 규례들 가운데, 무엇이 가장 우선되고 중요한 계명인지 알고자 했습니다. 그의 질문은 단순히 학문적인 호기심이 아니라, 진정한 삶의 방향과 핵심을 찾으려는 진지한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서기관 중의 한 사람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하신 말씀을 듣고 매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는 비록 바리새인이었지만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예수님의 말씀에 적대감이나 불의한 의도가 없이 순전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평소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의문에 대하여 예수님께 질문하였습니다. 그것은 모든 계명 중에 가장 첫째 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28).
이 질문은 당시 율법학자들 사이에서도 논쟁이 되고 있었던 사안이었습니다. 그들은 계명을 큰 것과 작은 것,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으로 구분하여 약 613개의 계명을 정해 놓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보다 하나님을 섬기라는 계명이 우선한다고 생각하였고, 이를 악용하여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르반)”고 하여 부모에 대한 부양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기도 하였습니다(마 15:5-6). 이처럼 계명의 우선순위에 대한 문제는 그들 사이에서도 끊임없이 쟁론거리가 되어 왔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삶 속에서 율법을 철저히 지키려고 노력하였기 때문에 어떤 계명이 우선인가에 대한 문제는 그들에게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도 모세오경만을 믿는 사두개인들은 성경에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은 유전이나 전통을 인정하지 않았기에 바리새인들과 더 많은 충돌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어느 계명이 큰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자신들 안에서도 여전히 논쟁거리로 남아 있었기에 이 서기관은 그에 대한 질문을 예수님께 물은 것입니다. 이러한 서기관의 모습을 통해 삶 속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대하여 논쟁보다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성경을 통해 말씀하고 계신지를 묻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악용하는 일도 없어야 합니다. 이기적인 생각으로 나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는 것은 매우 악한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은 믿음의 유익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어야 하며, 어떠한 개인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한 의도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30-31).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목숨과 뜻을 다해 전 생애를 다하여 사랑할 것이며, 이웃 사랑도 그와 같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레 19:18).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두 계명이 바리새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어떤 것이 무겁고 어떤 것이 가벼운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과 같이 서로 뗄 수 없는 계명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할 수밖에 없으며, 이웃을 미워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눈에 보이는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증명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요일 3:16). 이러한 말씀은 예수님의 대속으로 인해 참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으며, 그 사랑으로 형제들을 대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형제들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위해 죽으셨음을 진심으로 깨닫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 계명은 우리의 신앙이 단순히 외형적 율법 준수에 머물러서는 안 됨을 보여줍니다.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계명을 철저히 지킨다고 자부했지만, 정작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를 놓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들이 계명을 겉으로만 지키는 형식적 신앙에 머물렀음을 증명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형제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면서 정작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않으면 아무런 유익이 없으며 그것은 죽은 믿음이다”라고 말했습니다(약 2:15-17). 입술로는 믿음을 말하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이웃의 어려움에 외면하는 모습이 우리의 신앙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서기관은 예수님의 말씀에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라고 신앙을 고백하며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인정합니다(32). 이것은 그동안 다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대하던 태도와는 매우 다른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는 율법 준수와 전통적 제사를 중요하게 여겼던 당시 바리새인들의 기준에서 볼 때 매우 파격적인 신앙고백을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의 계명이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더 중요하다고 고백한 것입니다(33).
예수님께서는 그의 담대한 고백을 들으시고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라고 칭찬하십니다(34). 이러한 서기관의 고백은 공동체 안에서 고립될 위험을 무릅쓴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진실로 예수님으로 인해 깨달은 믿음을 담대히 고백한 것입니다. 그의 모습은 여론을 두려워하여 신앙을 제대로 고백하지 못하는 우리의 연약함을 돌아보게 합니다. 진리를 따르고 창조주 하나님을 고백하는 믿음은 여론을 쫓아가는 신앙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집중된 신앙이어야 합니다.
이 계명은 우리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이 계명은 단순한 교훈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행동과 선택을 지배해야 할 기준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그 사랑 안에서 서로를 사랑하고 섬기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는 단순히 율법적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응답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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